'워킹맘 발레리나' 강미선, 무용계 오스카상 품다

입력 2023-06-21 18:07   수정 2023-06-22 02:19


발레리나에게 ‘몸’은 연주자의 악기와 같다. 평소에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공연 때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없다. 무용수들이 기술을 연마하는 것만큼이나 체중·체력 관리에 힘을 쏟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무용이건, 스포츠건, 몸을 쓰는 직업에는 전성기가 있는 법. 발레에선 오랜 기간 ‘출산=은퇴’ ‘출산=2선 후퇴’가 하나의 공식이었다. 육아 부담 때문만은 아니다. 출산 후 체중 변화와 체력 저하로 무대를 감당하기 버거워서다.

강미선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40·사진)가 이런 공식을 깨버렸다. ‘무용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를 불혹의 나이에, 그것도 ‘워킹맘’으로 받았다.
○“출산 후에도 멋진 춤 출 수 있다”
지난 20일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브누아 드 라 당스 시상식에서 중국국립발레단 추윈팅과 함께 ‘최우수 여성무용수상’을 받은 강미선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세계적인 무용수가 대거 후보에 올라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수상 소식을 듣고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로 놀랐다”고 말했다.

1991년 출범한 브누아 드 라 당스는 ‘무용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권위 있는 상이다. 매년 세계 정상급 발레단의 작품을 심사해 최우수 남녀무용수, 안무가, 작곡가 등을 선정한다.

올해는 워낙 쟁쟁한 여성 후보들이 올라 심사위원들이 재투표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수석무용수 도로시 질베르, 볼쇼이 발레단 수석무용수 엘리자베타 코코레바 등이 강미선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강미선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워킹맘 발레리나’다. 그는 같은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인 러시아 출신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와 결혼해 2021년 10월 아들을 출산했다. 은퇴할 것이란 일각의 예상을 깨고 그는 5개월 만에 일터로 복귀했다.

강미선은 “나이가 있다 보니 출산 후 복귀 여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며 “하지만 쉬는 동안 발레에 대한 간절함이 더 커져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출산 후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개인 연습 시간도 줄어 힘들었지만, 오히려 연기가 깊어지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며 “출산을 고민하는 후배 발레리나들에게 ‘아이를 낳아도 멋지게 출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롤모델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국악 창작 발레 ‘미리내길’로 수상
강미선은 밑바닥에서 시작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주역이 된 ‘대기만성형’이다. 선화예중·고와 미국 워싱턴 키로프 아카데미 등을 거쳐 2002년 국내 양대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에 연수 단원으로 입단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추는 군무(群舞) 무용수로 시작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2012년 수석무용수로 승급했다. 21년 동안 한 발레단에서 근속하며 ‘백조의 호수’ ‘지젤’ ‘로미오와 줄리엣’ ‘춘향’ 등 주요 작품을 섭렵했다.

그는 기술과 표현력, 예술성을 두루 갖춘 발레리나로 평가받는다. 발레리나에 딱 맞는 체격을 타고나지 않았지만, 끊임없는 연습으로 극복해낸 ‘노력형 천재’ 소리를 듣는다. 어느 작품을 맡아도 멋들어지게 소화해내다 보니 발레 마니아들은 ‘갓(god)미선’으로 부른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은 “성숙한 표현력과 테크닉을 갖췄으면서도 항상 ‘연습벌레’처럼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번 수상작이 한국 냄새가 물씬 나는 창작 발레 ‘미리내길’이란 것도 의미 있다는 평가다. 이 작품은 작곡가 지평권이 만든 동명의 국악 크로스오버(혼합 장르) 곡을 바탕으로 한국 무용의 특징을 녹였다. 강미선은 이 작품에서 먼저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를 연기했다. 그는 “앞으로 세계 무대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작품을 더욱 많이 알리고 싶다”고 했다.

국내 무용수가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받은 건 강미선이 다섯 번째다. 1999년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국내 최초로 수상했고, 국립발레단의 대표 주역 무용수였던 김주원(2006년)과 김기민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2016년), 박세은 파리 오페라 발레 수석무용수(2018년) 등이 뒤를 이었다. 워킹맘이 받은 건 강미선이 국내 최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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